Ban Jaeha 반재하
Nothing to My Name
일무소유
一無所有

2019.11.12 - 11.21

Seoul Art Space Mullae, Seoul  문래예술공장, 서울

Curator: Haemin Ryu
Supported by Arts Council Korea
Participated Artists: Youngmean  Kang, Jaeha Ban, Minwook Oh, Gihyun Jo

큐레이터: 류혜민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참여 작가: 강영민, 반재하, 오민욱, 조기현





대림동

장소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의는 일견 특정한 장소를 어떻게 기억하고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닮아있다. 중국 푸젠성의 항구 도시 샤먼(厦门)에 가까운 타이완의 섬 진먼(金門)을 다룬 영화 <해협>(2019)이나 부산의 사라진 행정동인 범전동의 풍경을 다룬 <범전>(2015) 등에서 오민욱은 과거에 그곳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을 리서치하고 그 자료들을 현재 시점에서 촬영한 이미지와 결합하는 방법으로 장소를 기록해 왔다. 이 영상들은 진실로서 통용되는 사실 관계를 기반으로 촬영되긴 했지만 오민욱은 ‘완벽한 확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영화'에 대해 항상 의심한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스스로도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실제이자 진짜라고 말하는 것을 항상 의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로 지나가버린 시간을 붙잡아놓는 영상 매체의 기록은 오민욱에게 오히려 이 화면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더 적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런 측면에서 장소는 이미 존재하는 완성된 무언가라기 보다 구성되어지는 수행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하다.



이번 전시에서 오민욱이 보여주는 <도림로 29길>(2019)은 그가 지금까지 공간을 기록하는 방식과 정반대의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러닝룸》에서 영화 <해협>을 위해 중국 샤먼에서 촬영했지만 최종본에는 담지 않은 영상 데이터를 보여주었고, 그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도림로 29길>은 사전 정보 없이 대림역 근처 도림로 29길에 도착해서 하나의 프레임으로 담아낸 풍경 이미지와 소리를 10분 53초라는 타임라인 안에서 레이어간 시차가 겹쳐지도록 편집했다. 이렇게 겹쳐진 도림로 29길의 풍경은 오민욱이 고민했던 프레임 바깥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담아낸 것일까, 아니면 장소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일까.  <도림로 29길>은 장소와 기억의 관계를 질문한다.



조기현의 <투명한 막–어안 렌즈, 일출, 부재>(2019)는 이 전시에서 대림동의 풍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영상 작업이다. 이 영상은 왜곡이 심한 어안 렌즈로 새벽 시간의 대림동을 담았고 1초당 120프레임으로 의도적으로 천천히 풍경을 볼 수 있게 편집했다. 이를 투사하는 스크린도 오목한 굴곡을 주어서 화면의 왜곡을 더욱 강조한다. 내러티브 없이 42분 동안 흘러가는 영상은 제목에서처럼 새벽 시간의 빈 대림동을 담았다. 서울의 법정동 중 한곳인 대림동은 언제부턴가 조선족 혹은 중국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고, 중국인이나 대림동을 향한 편견과 혐오가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조기현은 이 영상 설치를 거울에 비유하는데, 마치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처럼 렌즈와 스크린은 쌍을 이루며 그 앞에 앉은 관람자 한 명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빈 공간으로 은유된 새벽 시간의 대림동은 이곳에 투영된 혐오와 차별까지도 비운 상태로 보여줄 수 있을까.






중국 조선족

50대 아빠를 돌보는 청년 보호자이기도 한 조기현은 최근 지난 9년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 『아빠의 아빠가 됐다』(2019)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불투명한 막–클로즈업, 간병, 신체>(2019)는 중국 동포이자 간병 노동자인 조혜리가 병원에서 촬영한 영상을 여러 겹의 샤 원단에 투사한 작업이다. 7분 52초의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 영상에서는 요양 병원에서 돌봄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수행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간병 노동자가 어르신의 신체를 물티슈로 닦아내고, 양치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고, 어르신들이 가장 오래 지내는 침대는 어떻게 관리되는지. 이 영상은 또한 이렇게 노쇠하고 혼자 무언가 해결할 수 없는, 돌봄이라는 관계가 반드시 필요할 때 인지되는 신체를 관객의 신체에 대한 스크린의 논의와 연결시켜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는 조기현이 《러닝룸》에서 토마스 엘새서(Thomas Elsaesser)를 인용했던 “⟨노동의 싱글숏⟩의 목표, 말하자면 그것의 비판적이고도 해방적인 임무란 우리로 하여금 [노동을] 다시 보게 하는 것, 뤼미에르적 제약에 집중된 주의력을 세부, 몸짓, 과정을 발견하거나 재발견하는 데 쓰는 것”이라는 부분을 상기시킨다.



조선족과 협업한 작업은 반재하의 <표백된 무대>(2019)와 <무대 의상>(2019)으로 이어진다. 퍼포먼스와 연극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반재하는 중국 동포이자 소위 한국에 ‘잘 적응한’ 서남권 글로벌센터의 전문 상담사이자 사단법인 조각보의 공동 대표인 박연희를 인터뷰한 영상으로 <표백된 무대>를, 그의 취향을 반영한 맞춤옷 <무대 의상>을 제작했다. 여기서 잘 적응했다는 기준의 적용은 다문화주의라는 명분하에 한국 사회에 부여받은 특정한 역할을 얼마만큼 잘 수행해냈는지에 따라 적용되는 것으로, 반재하는 자유주의가 관용과 포용이라는 이름하에 치장한 통치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화면 합성 등의 특수 효과를 위해 이용하는 배경인 크로마 키(chroma key)벽을 영상에서 사용한 것에서 <무대 의상>으로 연결된다. 이 작업은 반재하가 박연희와 사전 인터뷰를 하던 도중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박연희가 연변에서 방송국 PD로 근무하던 시절 회사에서 배포한 근무복은 개량 한복이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한민족으로 삼고 있었는데 정작 한국에 왔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진 자신은 한복이 아니라 치파오를 입어야 하는 타자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아무 배경이 없는 그린 스크린 앞에서 치열하게 연기해야하는 배우들처럼, ‘한민족’으로서, 중국인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연기는 조선족에게 부여되는 다중적 역할이다.



《러닝룸》에서 반재하와 조기현은 작가로서 타자와의 거리를 설정하는 포지션의 위치가 정반대라는 비평을 듣곤 했다. 타자의 삶에 깊숙히 들어가거나, 타자의 이야기를 생생히 가져오는 것이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 예를 들어 온정적인 시선을 투영하게 되거나 타자를 관용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에 대한 반감은 반재하가 의도적으로 타자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는 이유이다. 타자와의 일정 거리를 두면서 구조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그의 포지션은 이번 작업의 미학적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반면 조기현은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에 다가가거나 재현의 문제를 고민하고, 대상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성찰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불투명한 막–클로즈업, 간병, 신체>의 제작 과정에서 사실 조기현은 직접 간병인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병원 측에서 이를 불허했는데, 그래서 대안으로 조혜리가 영상을 촬영한 후에 조기현은 영상을 전달 받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은 오히려 조기현이 카메라를 위임하면서 타자의 역량이 강조되는, 진정성을 위임해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확장되는 기회가 되었다.






이주・아시아

강영민의 <포도마마는 버드나무 아래서 봄을 기다린다>(2019)는 버드나무 가지에 디지털 허수아비를 매달고 그 위에 영상을 프로젝션한 작업이다. 디지털 허수아비는 강영민이 지난 9월 남원에서 열린 전시에서 <숲과 허수아비>(2019)로 선보인 이후 두 번째 버전이다.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 허수아비는 만주족 신화에 나오는 버드나무 여신 포도마마(Fodomama)에 그의 캐릭터 하트를 합성해서 전지(剪紙) 공예로 제작됐다. 전지 공예는 가위나 조각칼을 이용해 종이에 있는 문양을 오리는 것으로, 동북아시아 북방민족의 오래된 전통으로서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부족민들이 둘러앉아 나무껍질이나 종이를 오리며 화합을 다졌다고 한다. 이 위에 겹쳐지는 영상은 1931년 만주 지역에 세워진 만주국의 국기로 시작해서, 홍콩의 뉴스 매체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南華早報)에서 제작한 중국의 소수 민족 중 하나인 오로첸족(鄂伦春族, Èlúnchūnzú)에 대한 다큐멘터리, 그리고 북한의 인기 가수인 김광숙의 대표곡 ‘푸른 버드나무’로 이어진다. 강영민은 작가 노트에서 “일본제국은 만주국을 건설하며 오로첸족을 '동양의 아리아인'으로 신성화했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중국을 침략한 영국의 홍콩 총독부 기관지였다. 아시아 근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두 세력을 종이인형에 투사해 아시아 민중의 '주체의 공백'(the Void of Subject)을 상징해보았다”고 쓰고 있다.



전지 공예는 중국에서 특히 한족(汉族, Hànzú)이 자부하는 전통 풍습 중 하나이지만 안타깝게도 전지의 기원은 중국이 아닌 알타이 문화가 원류라고 한다. 그리고 진지해 보이는 오로첸족의 다큐멘터리 제작사는 영국의 홍콩 식민지 지배 초기 청나라의 정보를 손쉽게 얻기 위해 발행한 영자 신문을 시작으로 설립된 매체이다. 거기에 서정적인 가사의 북한의 인기가요 ‘푸른 버드나무’까지 울려 퍼지는 이 설치는 대림동에서 시작해서 만주와 북한,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넘나드는, 무언가를 위한 제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정체를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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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동과 중국 조선족, 이주・아시아를 주제로 시작한 이번 프로젝트는 김태윤이 기획한 네트워킹 파티 겸 아시아 음악 DJ 파티 ‘대림동엔 양꼬치 먹으러 가는 줄만 알았다’로 시작해서 안대웅이 기획으로 참여한 《러닝룸(Running Room): 간병인, 거리입양, 구제역, 국경, 기시감, 다운사이징, 만주국, 오로첸, 전이, 카메라, 풍경, 흑룡강》 전시, 그리고 《일무소유(一無所有, Nothing to My Name)》를 끝으로 마무리 된다. 999 라이브 바에서 진행된 네트워킹 파티에서는 서울 음악 신의 변방인 대림동에서 벌어진 춤판이 중국판 유튜브로 불리는 콰이쇼우(快手)를 통해 실시간 방송으로 조선족 동포 사회에도 전달되었다. 완벽한 계획에서 달아나기를 시도한 《러닝룸》에서는 《일무소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주제를 바라보는 참여자들의 고민과 시선의 교차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가 프레젠테이션에서 이어졌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일무소유》는 중국 조선족이자 중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최건(崔健)의 대표곡에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는 문화 번역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최건은 원어로는 ‘추이젠(Cuī Jiàn)’으로 발음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일무소유는 ‘이우쒀요우(Yì Wú Suǒ Yǒu)’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어 간체로는 ‘一无所有’로 쓰고 중국어 번체이자 한국에서 통용되는 한자로는 ‘一無所有’로 쓴다. 영어 제목은 ‘Nothing to My Name’, 한국어로 풀어 말하면 '내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정도의 뜻이다.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때 이 노래가 학생과 민중들을 고무시키는 것을 경계한 중국 공산당 정부가 공연을 취소시키자 이에 대한 저항적 메시지의 일환으로 붉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무대에 오른 퍼포먼스는 최건을 아는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 노래가 특정한 사회상을 강하게 연상시키면서도 언어와 지역을 달리 하며 갖는 왜곡과 오해, 미끄러짐은 이번 전시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지난 몇 달간 홍콩에서 전해진 거센 민주화의 물결이 한국에 ‘레논 벽(Lennon Wall)’을 불러 놓았다.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 된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거대한 폭력을 마주했을 때 존 레논을 떠올린다. 최건과 존 레논은 모두 폭압에 대항했지만 최건의 노래는 보다 큰 상실감을 부른다. 종교, 국가, 전쟁으로부터 사랑과 평화를 이끌어내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한 ‘Imagine’에 비해 ‘일무소유’에는 가진 것 없고, 자유 마저 내어주며, 기다림을 부르짖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폭압을 마주하고도 구체적인 대상을 상실한 채 일갈하는 정동은 노래가 갖는 상징성의 이면이다. 아마도 그에게 중국 조선족으로서 중국 사회주의와 다른 민족들과의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일관된 시선을 드러내기 어려운 감각이 자라났던 것은 아닐까. 보편적 인권이 상시적으로 유동하는 접경지대로서 성원권은 직접적인 폭력 못지않게 공존을 위협하는 장이다.



중국 동포, 재중 동포, 재중 한인 등의 표현을 보더라도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동포 혹은 한인이라는 표현은 사회통합을 염두에 두고 한국으로의 귀속성을 강조하거나 차별과 배제를 지양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통합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담론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상황을 대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이라는 말은 그들이 형성된 역사적 기원과 시대적 맥락에 근거해 현재 분화하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림동에서 조선족 또한 더 이상 이주민과 선주민의 이분법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외국인이 아니라 국민이기도 하고, 때로는 대림동의 더 오래된 정주민이기도 하다. 성원권이 형성된 과정에 차이만 있을 뿐 아무런 차별과 혐오 없이 동등하다면 거짓말이지만, 한 가정 내에서도 중국 조선족 출신과 한국 태생이 섞일만큼 성원권의 경계는 날이 갈수록 양상을 달리한다.



《일무소유》는 현대미술담론에서 낡았다고 얘기되는 것들, 장소특정적이거나 실제 현장과 결부되어 있는 주제, 타자나 진정성, 재현의 문제를 다룬다. 이런 주제는 이른바 주류에서 밀려난, 그러나 현실에서 맞닥트리는 것들이다. 《일무소유》는 대림동과 조선족을 포함한 한국 사회에서의 다문화주의와 동아시아의 초국적 이주 역사, 아시아주의를 가로로지르며 과거와 현재, 지역과 아시아라는 스케일을 감각적인 방식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류혜민











© Ban Jae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