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 Jaeha 반재하
PLAY HOME, SWEET HOME
플레이 홈, 스위트 홈
2023.06.03-04

Post Territory Ujeongguk, Seoul
탈영역우정국, 서울

기획・연출: 반재하
협력기획: 박근영
프로듀서: 강재영(더블데크웍스)
드라마터그: 김솔지(더블데크웍스)

인터뷰이: 김성희, 리위력, 박연희, 정남경, 하승희, 익명
3D모델링: 반재하
퍼포머: 고미랑, 박근영, 표창연, 한주예슬

음악감독: 오로민경
사운드협력: 조지훈
그래픽 디자인: 파이카
현장지원: 임가영, 정채현
구조물 제작: 김우경
기술자문: 김재현
공연자문: 이혜령
3D자문: 곽환희























해체적 사유를 구축하기





집이란 건 뭘까. 정신의 근원이자 정서의 안식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설파했듯, 집은 인간 사유의 근간이다. 집에서 자라나고 집 안에서 지성을 키우면서 집의 구조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구축’한다는 것. 표상이자 물성을 가진 실체로서의 집은 기억과 소망, 과거와 미래를 담는 존재론적 은신처다. 소설이나 음악의 형식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회귀본능의 사상적 귀착점이기도 하다. 혹은, 아기곰 푸가 선언하듯, 집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장소”다. 그래서일까. 집은 자본주의가 전환하는 최고의 교환가치를 갖는다. 자본주의야말로 오늘날 집이 가장 깊숙하게 안주시키는 삶의 형식이다. 교환의 논리는 휴식이 아닌 욕망이다. 탐욕과 휴식은 집으로 인해 동전의 양면이 된다. 그리하여 집은 자본주의를 뼈 속 깊이 침투시킨다.

“안녕하세요, 근영씨,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이메일을 씁니다. 제가 얼마 전에 여섯 번의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인터뷰 질문은 ‘갈 수 없는 어떤 곳에서 살게 된다면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입니다. 저는 그 인터뷰들을 기반으로 두 개의 집을 구현했어요. 부탁하고 싶은 건 그 집을 묘사해달라는 겁니다.”

큰 스크린에 캡처된 한 통의 이메일로 작품이 시작된다. 작품을 만든 반재하 작가가 ‘근영씨’에게 보낸 내용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근영씨’의 목소리가 작품이 이뤄지게 된 경위를 소개하면서 ‘사건’으로서의 집이 펼쳐진다. <PLAY HOME, SWEET HOME>은 그렇게 장소 기반의(site-specific) 작품으로 전개된다. 작품의 기반이 되는 ‘장소’는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집이다. 가상적 집의 가상적 투어.

전시장 구석의 한 작은 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실시간으로 투어를 이끄는 ‘근영씨’(로 추측되는 화자)가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이메일상의 청탁에 따라 “이상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 채의 집이 완성됐다. (“이상적인 풍경”이란, 화자가 만난 세 명의 인터뷰이들이 가고 싶어 한다고 말한 장소들을 합성한 “혼재된 풍경”이다. 이 상상적 복합체는 “이상적인 집”을 짓는 터가 된다.) 집에 가구, 소품들과 더불어 기억과 소망, 과거와 미래의 단상들이 담긴다. (이틀에 걸쳐 진행된 퍼포먼스는 각기 다른 인터뷰이들이 상상해낸 다른 집을 하루씩 소개했다.) 화자의 설명에 동기화된 시각적 여정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와중에 전시장 벽을 따라 만들어진 세 구역에서는 독립적인 사건들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CAD 프로그램으로 건축 도면을 만들고 있고, 그 건너편에서는 미니어처 집을 짓고 있다. 둘 사이의 벽 쪽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집안 곳곳을 붓으로 그리고 있다.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는 이들은 주된 화자의 책무를 나누어 짊어지듯 인터뷰이들의 상상에 따라 지어지는 “이상적인 집”에 구조와 물성과 인상을 부여한다. 상상된 집을 직관적으로 방문객과 공유하는 방식은 ‘근영씨’의 내레이션을 포함, 네 개의 채널을 통해 발생하는 셈이다. 그들은 서로 격리된 각자의 평행 현실 속에서 과묵하게 집을 만드는, 혹은 ‘집’이라는 관념을 구축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다변적인 재현 체계가 하나의 집을 합작한다면, 그것은 과정부터 헤테로토피아다. 그것은 한 채의 집이자, 여러 평행 현실들로서의 각자의 상상이기도 하다. 파편화된 평행 현실들이 가상을 변죽하는 형식은 곧 작품의 혼재적 형식을 구축한다.

“근영씨의 말을 기반으로 또 다른 집들이 만들어질 예정이에요.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말씀해주시면 돼요. (...) 사례비는 유선상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작가의 최초 이메일에 따르자면 관객 앞에 다각적으로 펼쳐지는 집은 세 사람의 인터뷰이들의 비전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전달자이자 화자인 ‘근영씨’의 해석으로 걸러지고 각색된 “또 다른 집”이다. 어디까지가 원래의 집단 유희의 상상이고 어디부터가 ‘근영씨’가 파생한 “또 다른 집”이 시작되는지는 우리로서 알 길이 없다. 또 어디부터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독립된 재현을 이끄는 세 사람의 해석이 되는지도 묘연하다.

상상적 집의 재현은 곧 그것을 만드는 과정으로서 펼쳐진다. 말과 그림의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주된 화자의 정보가 지배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동안 개별적인 창작자들의 행위는 카메라 혹은 컴퓨터를 통해 각 구역의 외벽에 달린 모니터로 전송되면서 한 층위 더 매개화된 형태로서의 상상적 현실을 전달한다. 공간(집)은 시간(행위)으로 펼쳐지고, 집을 만드는 시간의 궤적은 공간적 재현(그림, 미니어처)으로 남는다. 카메라로 재현되는 미니어처 집은 실물에 환영적 아우라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 채의 집은 매체를 달리하는 단상들의 조합으로 관객의 머릿속에서 합체된다. 평범한 듯 수상한, 완성을 지향하지만 온전할 수 없는, 끝말잇기 같은 수행적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목도하는 관객은 이 모든 과정에 마침표를 찍는 완성자일지도 모른다. 미완의 헤테로토피아를 완성하는 개입자. 그리하여 어느새 우리는 안과 바깥의 구분도 없는 것 같던 가상적 집의 내부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작품을 작동시키는 것은 감지되지 않는 모순적 역설이다.

역설은 파편적 단상들로 가상의 집이 머릿속에서 형체를 갖추어가는 동안 간극을 개입시킨다. 네 개의 차원으로 갈린 개별적 재현이 상세해질수록 틈새가 커진다. 벽의 무늬, 가구, 소품 등 인테리어의 디테일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서 차이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거듭난다. 이를테면 식탁 위 샹들리에는 말로 투어를 이끄는 화자의 영상 속에서의 화려한 모습과는 다른, 다소 단순하고 소박한 디자인으로 미니어처 집 천장에 매달린다. 네 가지 재현 방식은 장님이 더듬는 코끼리처럼 파편화된 실체를 추론시킴과 동시에 각 감각의 차이를 증폭시키거나 전경화시킴으로써 차이가 드러내는 상상적 유연함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발동시키기도 한다. 공백에 대한 촉이랄까. 실존하지 않는 가상 속의 집은 하나의 구체적 형태로 총체화되는 대신 경계가 가변적인 진동체로서 그 파생적 존재감을 유령처럼 발산한다. 작품은 4차원으로 변환된 입체파 그림처럼 개별적 관점들 간의 불일치를 가시화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신체로서의 집을 실시간으로 그려낸다. 집이 진동하고 재현이 진동하니 그에 응대하는 관객의 감각 역시 불확정적으로 진동한다. 그 와중에 작품이 펼쳐지는 전시 공간은 서사가 구축되는 과정을 전경화 함으로써 (진동의) 시간을 공간으로 전환한 상태로 전람한다. 미니어처와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렇게 하나의 대상임과 동시에 시간의 기록으로 남게 된다. 그것은 곧 진동의 기록이자, 시공의 진동 그 자체다.

혼재적 공간에 파편화된 형태로 해체/재구축되는 서사의 시공은 선형적인 시간과 총체적인 공간으로부터 이탈하여 구조적 균열을 내포하는 관념으로서의 시공으로 ‘구축’된다. 간헐적으로 천장에서 예고 없이 떨어지는 종이에는 느닷없는 문장들이 적혀있다. 작품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서나 밝혀지는 건, 이 문장들이 실제 인터뷰이들의 말에서 발췌된 파편들이라는 사실. (마지막 크레딧을 통해) 알고 보니 인터뷰이 세 사람은 각기 북한에서 살다가 오거나, 북한에 잠시 갔다가 오거나, 북한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가상적인 집을 소개하는 서사 속에 숨겨졌다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이 프로젝트의 근원적 원천은 북한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어쩌면 서사를 촉발시키고 스스로 자취를 감추는 맥거핀처럼 작동한다. 아니, 도리어 ‘집’이라는 맥거핀이 도달하는 최종의 목적지가 ‘북한’인 걸까. 어쨌든 어디까지가 북한으로부터의, 북한에 대한 상상이고 어디부터가 ‘비-북한’의 각색인지 알 길이 없다. 상상된 ‘집’이 그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균열과 왜곡이 감각의 레이더를 피해 우리의 감각 속에 스며든다. 감지되지 않는 ‘북한’이라는 관념이 간첩처럼 감각을 침투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구체적인 차이가 아니라 관념으로서의 차이다. 관념으로서의 북한이다. (모호한 관념으로서의 ‘북한’은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설 것조차 저항한다.) 이 작품이 제시하는 집이 관념이듯, 그것에 내재하는 구성적 불확정성 역시 관념인 게다. 어쩌면 전시장의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는 공백이 지시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원형으로서의 집, 혹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원형으로서의 북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살다가 온 사람, 북한에 잠시 머물러 본 사람, 북한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루는 기묘한 세트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마카로니 웨스턴 <선한 자, 악한 자, 추한 자>가 이분법적 구분의 결격된 주체 자리로서 ‘아름다운 자’를 배제하듯,) ‘북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배제시킨다. 상상은 이러한 결핍의 논리로부터 시작되고 뫼비우스의 띠를 순환하며 결국 공백의 자리에 귀착한다.

“평양이나 이런 데는 너무 매체를 통해서 많이 접하기도 했고...”

“분단이라는 두 글자가 가진 그 깊이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아파트 싫어요. 평양에 많은 아파트가 있지만 제가 평양에서 3년 있으면서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올라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종이에 적힌 문장들은 투어가 끝날 무렵에서야 인터뷰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좀 더 온전한 상태로) 전달된다. 마치 미래로부터 도착한 암호 메시지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예언처럼, 산발적인 문장들이 작품 초반에 애초에 우리에게 발설했던 비밀이 있다면, 그 내용상의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횡단하는 뫼비우스 띠 같은 시간의 구조적 순환성이다. 비선형적 서사 구조는 그것에 실린 내용으로서의 집의 구성을 묘연한 가상적 회오리 속으로 휘감는다. 비결정적인 구조 속에서 이미 결정된 어떤 일련의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서사적 논리가 그 존재감을 현장에 슬쩍 삽입한다. 그것은 태풍처럼 그 한 가운데에 빈 공간을 머금고 있다. 전시장 중심의 폭풍의 눈 같은 공백은 비존재의 공권력을 작동시키는 구심점이다. 부재라는 논리의 집.

바슐라르의 말처럼 집이 사상의 근원이라면, 반재하 작가가 제시하는 집이란 유동적이며 유희적이고 유보적인 제스처들로서의 사상의 응집이다. 먼 상상의 지평이 아닌 의식의 경계에서 아른거리는 신기루랄까. 그것은 말더듬처럼 의미 체계의 바로 옆에서 의미 이면의 언어적 물성을 반복하고 번복한다. 끊임없이 유산됨으로써 다가가는 구조적 미완에는 스스로의 완성을 거부하는 어떤 비공식적인 의지가 숨 쉰다. 그것은 장중한 타나토스의 파괴력을 흉내 내는 대신 그 장중함을 우연으로 가장한 희미한 웃음으로 경쾌하게 변환시킨다. 헤테로토피아로서의 집은 몰래 작동하는 감각변환장치다.

관념적인 이질성을 슬그머니 극복하며 익숙함의 뒷문으로 침투하는 유령 조커 같은 형체 없는 발화 주체는 (‘지금-북한’의 반대쌍인) ‘비-북한’으로서의 묘연한 정체성을 관객과 공유하려 한다. 반재하 작가의 말대로, “북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가시화”되는 건, 남한 혹은 어떤 묘묘한 관념으로서의 ‘비-북한’의 작동방식인 게다. 막연한 이중 부정으로 성립되는 이 파생적 주체의 불완전한 자리는 불온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위기감은 어느 지루한 오후에 혼탁한 도시 대기에 울리다가 마는 가짜 경보사이렌처럼 결국 없던 일처럼 흐지부지된다. 그런 면에서 <PLAY HOME, SWEET HOME>은 부조리 코미디로서의 유전자를 짙게 지닌다. 애국적 정취로 완결되는 북한 담화의 사상적 비장함을 좌충우돌 진동의 파장으로 대체한다. 그 파장을 감지하는 우리의 방식은 웃음이다.

“강남, 강북 같은 말들이 있는 걸보니 한국에선 강 쪽이 다 좋은 것 같네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건데 이렇게만 해서 전시를 하면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이게 한국 집이랑 비슷하잖아요.”

유령 같은 헛헛한 유머는 메타버스 형태의 부동산 중개 프로그램과도 같은 지배적 화자의 서사가 갖는 형식적 익숙함에 희미한 균열을 가한다. 무관심이라는 보편적 보호색으로 위장한 유머 바깥의 유머. 작품 초반 스크린에 소개되는 일련의 가상적인 풍경에 작은 집이 하나 합성되면서부터 그 의뭉스런 유머는 작동하기 시작했다.

“실제보다 좀 작게 제작이 되었는데요.”

시내물가에 놓인 한 채의 집은 누가 보기에도 풍경의 스케일보다 작아 보인다. 수공예적 부적절함에 대한 양해를 근거 없는 무마가 대신한다. 작가의 미세한 유머는 집에 작지만 치명적인 균열을 내는 불개미처럼 서사의 작은 틈을 파고든다. 화자의 관점은 집에 입구가 보이지 않아 밀려오는 당혹감을 은근슬쩍 뛰어넘으며 집 안으로 관점을 이동시키는가 하면, 미처 렌더링 되지 않아 공백으로 남은 정체모를 가구 앞에서 기술적 결함에 대한 방문객의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이 의심스런 가구의 정체를 발설하는 건 천장에서 떨어지는 한 장의 종이다. 뒷담화처럼 퍼지는 정보에 따르면 공백의 자리에 있어야 할 가구는 텔레비전과 거치대다.

“그런데 TV가 있으면 뭐해. 다른 걸 못 보잖아. 정치만 하더만.”

인터뷰이의 사적 견해가 마치 검열의 칼처럼 최종 재현체에서 문제의 오브제를 도려낸 걸까. 어떤 권력 혹은 욕망의 역학에 의해 삭제가 이뤄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비밀을 누설하듯 위에서 내려오는 종이 한 장은 오류의 이면에 동기가 있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비선형적 부조리의 이면에 도사리는 대타자의 유희는 마법사 오즈의 변덕스런 마법처럼 폭력적이면서도 밋밋하고, 논리적인 듯하다가도 유아적이다. 유창한 듯 외설스럽다. 유머 속에 정체와 목적을 감춘 은근한 칼날이 도사리는 건 이러한 복합성 때문이다.

장치를 조작하고 있는 커튼 뒤의 익살스런 마법사는 끝내 정체를 감춘다. 구석방에서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버젓이 마이크로 자신의 목소리를 방송하는 ‘근영씨’는 그 빈자리를 감추는 대리자일 뿐, 그 너머의 빈자리는 장난스럽게 진동한다. 체셔 고양이의 웃는 입처럼 유머만이 덧없이 감돈다. 그는 사기꾼처럼 영영 흔적을 감추기 전에 완성되지 않는 집과 함께 선심 쓰듯 선물을 하나 남긴다. 집에 대한 외경이다. ‘집’으로부터 벗어나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그 관념의 중층들을 바라보기. 물론 형태가 없는 대상에게는 ‘바깥’도 없다는 딜레마가 선물과 함께 따라온다. 이런 부조리함이 어쩌면 자본과 안식의 묘연한 틈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비-북한’으로서의 우리의 현실일 지도 모른다. (반 작가가 말하는) “분단 감각”의 처세술. 집의 역설이랄까. 미로 같은 함정에서 빠져나가려면 스스로 미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유령 조커/마법사/사기꾼으로서의 대타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자신도 모를 것이다.

© Ban Jae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