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HOME, SWEET HOME
메이크 홈, 스위트 홈
2024.03.07.-09.
Doosan Art Center Space 111, Seoul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서울
퍼포먼스, 가변크기, 약 50분
연출・주최・주관: 반재하
퍼포머: 고미랑, 박근영, 임가영, 표창연, 한주예슬
조연출: 박근영
프로듀서: 강재영
드라마터그: 김솔지
리서처: 임가영
인터뷰이: 장철규(가명), 의봉(가명), 최설미
음악감독: 오로민경
어플리케이션 개발: 조지훈
기술협력: 스튜디오 애니멀
그래픽・무대 디자인: 반재하
메이크 홈, 스위트 홈
2024.03.07.-09.
Doosan Art Center Space 111, Seoul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서울
퍼포먼스, 가변크기, 약 50분
연출・주최・주관: 반재하
퍼포머: 고미랑, 박근영, 임가영, 표창연, 한주예슬
조연출: 박근영
프로듀서: 강재영
드라마터그: 김솔지
리서처: 임가영
인터뷰이: 장철규(가명), 의봉(가명), 최설미
음악감독: 오로민경
어플리케이션 개발: 조지훈
기술협력: 스튜디오 애니멀
그래픽・무대 디자인: 반재하
남한과 픽션의 가장자리:
반재하 론
곽영빈(PhD)
미술비평가/예술매체학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객원교수
‘남한의 바깥은 있는가?’
이는 자신의 작업 궤적을 소개, 요약하는 글의 말미에서 작가 반재하가 던진 의문이다. 물론 이 질문은 이상하다. 남한의 바깥이 왜 없겠는가?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연휴만 되면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꾸준히 해외 여행을 떠나는 21세기 한국에 거주하며 활동해온 작가가 이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한 자명성 너머에서 이 질문은, 명시적인 국경선 바깥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국경의 작동방식을 파악하고, 냉전의 현재성을 감각하며, 산업의 재편 과정을 추적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그의 추적은 그간 ‘유통’과 ‘분단’이라는 두 가지의 시점에서 이뤄져 왔다. 가령 ≪셔츠와 셔츠≫는 제목대로 두 종류의 셔츠를 병치한다. 하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생산된 유니클로 셔츠이고, 다른 하나는 똑같은 셔츠 수십 벌을 살 수 있는 돈을 원단 구입에서 유통까지의 전과정에 들여 만든 한 벌의 모조 셔츠다. 작가는 이 두 벌의 셔츠를 한국 노동운동사의 분수령에 기입된 동일방직공장 앞에서 선보였는데, 이를 통해 전지구적 노동 분업의 서로 다른 시차와 상황을 드러내려 했다.
물론 엄격히 말해 이러한 작업은 동시대적 자장 속에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가령 베트남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서로 다른, 혹은 같은 셔츠를 동일방직공장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병치시키는 지점은, <위로공단>(2014)에서 임흥순이 캄보디아 현지에 세워진 한국계 의료봉제공장의 노동쟁의 유혈 진압 사태와 한국의 노동운동사는 물론, 당대 시점의 한국에서 벌어진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위와 중첩시켰던 사례를 떠올려 준다.
더불어 곱씹어 볼 또 다른 참조점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가 작가로 코디 최와 함께 선정되었던 이 완의 대표작 ‘메이드 인’ 시리즈다. 2014년 제1회 ‘아트 스펙트럼 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했던 이 현재진행형의 시리즈에서 이 완은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쌀을 수확하려 휴경지와 트랙터를 빌려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린 후 두 달 반을 기다려 수확했고, 150불(약 20만원)을 살짝 상회하는 3그램 정도 크기의 금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 백 만원의 돈과 3주의 시간을 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도심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금광에서 금을 캤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울 정도로 이 과정이 힘들었다고 작가는 고백한 바 있지만, 그러한 멜로드라마적 정서는 작품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한 감정의 자리를 채우는 건 다소 건조한 자막들, 즉 선정된 아이템이 해당 국가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사에 대해 작가가 몇 달간 수행한 조사를 바탕으로 만든 설명문들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대만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설탕 산업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발원했다는 사실과, 비옥한 캄보디아 땅의 주력 산물인 쌀이 자국민의 1/3을 학살한 크메르 루즈 출신 군인에 의해 재배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끼의 아침식사를 직접 제작해보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소박해 뵈지만, 이를 통해 12개국에 이르는 아시아의 근대사 전체를 가로지른다는 의미에서 무모할 만큼 원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례들을 전통적인 의미의 ‘영향사’ 차원에서 파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의 ‘자장’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업이 독립적으로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인력’과 ‘척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반재하가 자신만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2024년 3월초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반재하 작가의 <메이크홈, 스위트홈>은 흥미로운 시도로 보인다. 이는 단지 이 작업이 AI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했다는 사실에만 기대지 않는다.
1시간 남짓한 길이의 이 다원예술 공연에서, 무대와 객석이 나뉘지 않은 개방형 공간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30여명의 관객들은 세 명의 남성과 여성이 자신들이 살았던 집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목소리를 차례로 듣게 된다. 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공연장 한쪽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이 실시간으로 형성된다. 자세히 보면 스크린 왼쪽에 또 다른 수직화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듣던 목소리를 일종의 문자메시지처럼 띄우면서, 동시에 이를 ‘이불장’, ‘낮아요’, ‘8단’, ‘흰색 꽃무니 타일,’ ‘나무 서랍장’ 등의 파편적인 단어와 이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들로 쪼갰다. 오른쪽의 스크린은 다시 상/하의 둘로 나뉘고, 이들은 각각 한글과 영어로 쪼개진 단어들에 기반해 실시간으로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단어들은 사실‘#해쉬태그’였는데, 이 모두는 챗GPT와 미드저니 등으로 익숙해진 AI(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산물이었다. 비슷한 듯 다른 두 개의 셔츠를 병치시켰던 <셔츠와 셔츠>의 연장선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완성되었고, 관객들은 둘 중 어떤 것이 더 그럴듯한지를 각자의 폰 QR코드를 통해 투표해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두 개의 이미지가 결정되자 한 남성 퍼포머가 마이크 앞에 나왔고, 그는 자신이 육안으로 보는 이미지를 말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는 세 명의 퍼포머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CAD(Computer Aided Design)를 사용하는 건축가, 미니어처 부품으로 무대장치를 만드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그리고 화가였다. 이들은 남성 퍼포머가 목소리와 언어로만 묘사하는 이미지를 귀로 듣고 각자의 방식으로 가시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들과 남성 퍼포머는 공연 내내 서로에게 등을 마주한 채 문제의 이미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계율을 지켰다. 그렇게 10여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세 명의 퍼포머는 각자가 귀로 듣고 해석한 건축도면과 무대세트, 그리고 수채화를 한 자리에 ‘출력’했다.
물론 이러한 공연의 포맷 자체는 서구에서 ‘중국식 속삭임(Chinese Whisper)’이라 불리는 고전적인 놀이 형태를 변주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가족오락관>에서 <아는 형님>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오락프로그램의 전통이 활용해 온 이 포맷은, 가령 엄청난 볼륨의 음악이 재생되는 헤드폰을 쓴 채로 일련의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끝까지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지 테스트한다. 관객이 향유하는 즐거움과 웃음은 처음의 메시지가 시시각각 뒤틀리고 오역되는 과정 속에서 커지는데, 작가는 이 유구한 놀이 모델을 AI의 LLM(Large Language Model)을 통해 청각 및 문자언어에서 시각적 이미지로의 이행으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인간이라는 매개자의 언어적 묘사 또는 필터를 통해 세 명의 인간 퍼포머들에게 분배했던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AI와 인간이라는 매개를 통해 확대된 오해와 실수의 최종 결과물들이 최초의 메시지와 갖게 된 차이, 또는 거리(distance)의 위상이다. <셔츠와 셔츠>에서 우리가 봤던 ‘차이와 반복’의 포맷은 여기서 다시금 소환되고 변주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Make Home>에서 전제된 ‘최초의 메시지’가 세 명의 남녀가 떠나온 집에 대한 언어적 회상/묘사이며, 이들은 모두 탈북자라는 사실의 함의다. 무엇보다 미묘한 것은 이들이 ‘진실’의 담지자로 자리매김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는 이들의 회상이 말 그대로 회상, 즉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변화하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억은 얼마나 믿을 만할까? 작가가 그간의 작업을 통해 그 누구보다 잘 보여주었듯, 탈북자들 자신과 관객은 물론, 남한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이 얼마만큼 사실에 부합하는지 당분간 대조해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감각이 제한되었던 건 공연장의 퍼포머들 만이 아니라 탈북자들 자신이기도 하다. 일종의 ‘기원(Ursprung)’의 자리에 놓인 이들의 위태로운 위상 자체를 보다 급진적으로 밀고 나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 ‘남한의 바깥은 있는가?’라는 질문은 ‘남한’의 경계 확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짝패 자체의 불투명성을 통해 재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최찬숙의 <60호>(2020)는 흥미로운 참조점이 된다. DMZ의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에 자리잡은 양지리를 다루는 이 오디오비주얼 작업 역시 전자의 물질적 자명성을 의문에 부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월북자와 일본인들이 버리고 떠나면서 무주물(無主物/Res nullius)이 된 땅에 형성된 이 마을은, 1980년대 들어 정부가 이 지역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각종 땅문서를 들고 나타난 자칭 땅주인들이 거주민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유재산권 관련 분쟁이라는 핑계로 정부가 팔짱을 끼고 관망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땅을 잃거나 하루 아침에 소작농으로 전락했는데, 작가는 특히 여성 이주자들에 주목한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토지소유가 호주제에 근거했기에 호주인 남편을 잃고 토지를 경작해 온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국 토지소유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라면 정치가들의 고질적인 무책임함이나 남성중심적 국가정책의 또 다른 폐해 사례로 정리될 수 있을 이 작업을 흥미롭게 만드는 건 목소리와 이미지가 (탈)배치되는 방식이다. 위의 기구한 사연을 토로하는 할머니가 오로지 목소리로만 등장하기에 이 내용을 귀로 들으면서 관객은 그가 잃어버린 집의 내부를 훑어보게 된다. 마치 드론 카메라처럼 기계적인 동선을 따라 집안 내부를 부유하는 시점은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육체성을 얻는 것 같지만, 하나의 몸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이 시선은 사실 유령처럼 부유한다. 이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고, 무엇보다 땅의 실소유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처럼 ‘60호’라는 숫자로 환원된 채 허무하게 무효화된 여성들의 법적 지위를 절묘하게 (비)가시화한다. 이러한 (비)가시성은 토지소유권 문제가 벌어진 양지리가 처음부터 대북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허상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더욱 첨예해진다.
최찬숙의 작업은, 특히 반재하가 자신의 이번 공연을 “닿을 수 없는 장소에 접근하는 유사이미지 생성 공연”이라 규정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절묘한 공명을 만든다. 과연 양지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의 대답을 가능케하는 이 질문은 <메이크홈, 스위트홈> 공연의 기원에 배치한 탈북자들의 기억이 갖는 성격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하지만 이들을 단지 ‘허구적(fictional)’이라 할 수 있을까? 양자는 전적으로‘거짓’이라거나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은 물론, 그 모두가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기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령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말과 사물, 존재와 이름 사이에 세워진 관계를 재조직하는” 작업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들은 ‘허구적’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임무”라 단언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변주해, 이를 ‘픽션의 물질성’이라 부르면 어떨까?
AI가 ‘요술방망이’처럼 만들어내는 수많은 문장과 수식, 영상과 소리들은 ‘북한’에 대해, 혹은 북한에서 만들어진 산물들보다 더 ‘허구적’인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전자에 대한 우리의 감식안은, 후자에 대해 우리가 누적해온 ‘섬뜩한 낯섦(unheimlichkeit)’의 정동 위에서 보다 세공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여전히 소환되곤하는 ‘냉전’의 시대착오적 위상은 전례 없어 보이는 전자의 도래에 맞서는 우리의 가장 시의적절한 참조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반재하의 근미래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냉전’과 ‘북한’의 유령들은 이런 근본적인 의미에서 ‘남한의 바깥’은 물론 ‘픽션의 가장자리’를 배회하게 될 것이다.
곽영빈(PhD)
미술비평가/예술매체학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객원교수
‘남한의 바깥은 있는가?’
이는 자신의 작업 궤적을 소개, 요약하는 글의 말미에서 작가 반재하가 던진 의문이다. 물론 이 질문은 이상하다. 남한의 바깥이 왜 없겠는가?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연휴만 되면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꾸준히 해외 여행을 떠나는 21세기 한국에 거주하며 활동해온 작가가 이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한 자명성 너머에서 이 질문은, 명시적인 국경선 바깥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국경의 작동방식을 파악하고, 냉전의 현재성을 감각하며, 산업의 재편 과정을 추적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그의 추적은 그간 ‘유통’과 ‘분단’이라는 두 가지의 시점에서 이뤄져 왔다. 가령 ≪셔츠와 셔츠≫는 제목대로 두 종류의 셔츠를 병치한다. 하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생산된 유니클로 셔츠이고, 다른 하나는 똑같은 셔츠 수십 벌을 살 수 있는 돈을 원단 구입에서 유통까지의 전과정에 들여 만든 한 벌의 모조 셔츠다. 작가는 이 두 벌의 셔츠를 한국 노동운동사의 분수령에 기입된 동일방직공장 앞에서 선보였는데, 이를 통해 전지구적 노동 분업의 서로 다른 시차와 상황을 드러내려 했다.
물론 엄격히 말해 이러한 작업은 동시대적 자장 속에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가령 베트남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서로 다른, 혹은 같은 셔츠를 동일방직공장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병치시키는 지점은, <위로공단>(2014)에서 임흥순이 캄보디아 현지에 세워진 한국계 의료봉제공장의 노동쟁의 유혈 진압 사태와 한국의 노동운동사는 물론, 당대 시점의 한국에서 벌어진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위와 중첩시켰던 사례를 떠올려 준다.
더불어 곱씹어 볼 또 다른 참조점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가 작가로 코디 최와 함께 선정되었던 이 완의 대표작 ‘메이드 인’ 시리즈다. 2014년 제1회 ‘아트 스펙트럼 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했던 이 현재진행형의 시리즈에서 이 완은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쌀을 수확하려 휴경지와 트랙터를 빌려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린 후 두 달 반을 기다려 수확했고, 150불(약 20만원)을 살짝 상회하는 3그램 정도 크기의 금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 백 만원의 돈과 3주의 시간을 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도심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금광에서 금을 캤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울 정도로 이 과정이 힘들었다고 작가는 고백한 바 있지만, 그러한 멜로드라마적 정서는 작품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한 감정의 자리를 채우는 건 다소 건조한 자막들, 즉 선정된 아이템이 해당 국가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사에 대해 작가가 몇 달간 수행한 조사를 바탕으로 만든 설명문들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대만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설탕 산업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발원했다는 사실과, 비옥한 캄보디아 땅의 주력 산물인 쌀이 자국민의 1/3을 학살한 크메르 루즈 출신 군인에 의해 재배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끼의 아침식사를 직접 제작해보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소박해 뵈지만, 이를 통해 12개국에 이르는 아시아의 근대사 전체를 가로지른다는 의미에서 무모할 만큼 원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례들을 전통적인 의미의 ‘영향사’ 차원에서 파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의 ‘자장’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업이 독립적으로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인력’과 ‘척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반재하가 자신만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2024년 3월초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반재하 작가의 <메이크홈, 스위트홈>은 흥미로운 시도로 보인다. 이는 단지 이 작업이 AI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했다는 사실에만 기대지 않는다.
1시간 남짓한 길이의 이 다원예술 공연에서, 무대와 객석이 나뉘지 않은 개방형 공간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30여명의 관객들은 세 명의 남성과 여성이 자신들이 살았던 집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목소리를 차례로 듣게 된다. 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공연장 한쪽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이 실시간으로 형성된다. 자세히 보면 스크린 왼쪽에 또 다른 수직화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듣던 목소리를 일종의 문자메시지처럼 띄우면서, 동시에 이를 ‘이불장’, ‘낮아요’, ‘8단’, ‘흰색 꽃무니 타일,’ ‘나무 서랍장’ 등의 파편적인 단어와 이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들로 쪼갰다. 오른쪽의 스크린은 다시 상/하의 둘로 나뉘고, 이들은 각각 한글과 영어로 쪼개진 단어들에 기반해 실시간으로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단어들은 사실‘#해쉬태그’였는데, 이 모두는 챗GPT와 미드저니 등으로 익숙해진 AI(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산물이었다. 비슷한 듯 다른 두 개의 셔츠를 병치시켰던 <셔츠와 셔츠>의 연장선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완성되었고, 관객들은 둘 중 어떤 것이 더 그럴듯한지를 각자의 폰 QR코드를 통해 투표해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두 개의 이미지가 결정되자 한 남성 퍼포머가 마이크 앞에 나왔고, 그는 자신이 육안으로 보는 이미지를 말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는 세 명의 퍼포머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CAD(Computer Aided Design)를 사용하는 건축가, 미니어처 부품으로 무대장치를 만드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그리고 화가였다. 이들은 남성 퍼포머가 목소리와 언어로만 묘사하는 이미지를 귀로 듣고 각자의 방식으로 가시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들과 남성 퍼포머는 공연 내내 서로에게 등을 마주한 채 문제의 이미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계율을 지켰다. 그렇게 10여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세 명의 퍼포머는 각자가 귀로 듣고 해석한 건축도면과 무대세트, 그리고 수채화를 한 자리에 ‘출력’했다.
물론 이러한 공연의 포맷 자체는 서구에서 ‘중국식 속삭임(Chinese Whisper)’이라 불리는 고전적인 놀이 형태를 변주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가족오락관>에서 <아는 형님>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오락프로그램의 전통이 활용해 온 이 포맷은, 가령 엄청난 볼륨의 음악이 재생되는 헤드폰을 쓴 채로 일련의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끝까지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지 테스트한다. 관객이 향유하는 즐거움과 웃음은 처음의 메시지가 시시각각 뒤틀리고 오역되는 과정 속에서 커지는데, 작가는 이 유구한 놀이 모델을 AI의 LLM(Large Language Model)을 통해 청각 및 문자언어에서 시각적 이미지로의 이행으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인간이라는 매개자의 언어적 묘사 또는 필터를 통해 세 명의 인간 퍼포머들에게 분배했던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AI와 인간이라는 매개를 통해 확대된 오해와 실수의 최종 결과물들이 최초의 메시지와 갖게 된 차이, 또는 거리(distance)의 위상이다. <셔츠와 셔츠>에서 우리가 봤던 ‘차이와 반복’의 포맷은 여기서 다시금 소환되고 변주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Make Home>에서 전제된 ‘최초의 메시지’가 세 명의 남녀가 떠나온 집에 대한 언어적 회상/묘사이며, 이들은 모두 탈북자라는 사실의 함의다. 무엇보다 미묘한 것은 이들이 ‘진실’의 담지자로 자리매김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는 이들의 회상이 말 그대로 회상, 즉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변화하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억은 얼마나 믿을 만할까? 작가가 그간의 작업을 통해 그 누구보다 잘 보여주었듯, 탈북자들 자신과 관객은 물론, 남한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이 얼마만큼 사실에 부합하는지 당분간 대조해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감각이 제한되었던 건 공연장의 퍼포머들 만이 아니라 탈북자들 자신이기도 하다. 일종의 ‘기원(Ursprung)’의 자리에 놓인 이들의 위태로운 위상 자체를 보다 급진적으로 밀고 나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 ‘남한의 바깥은 있는가?’라는 질문은 ‘남한’의 경계 확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짝패 자체의 불투명성을 통해 재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최찬숙의 <60호>(2020)는 흥미로운 참조점이 된다. DMZ의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에 자리잡은 양지리를 다루는 이 오디오비주얼 작업 역시 전자의 물질적 자명성을 의문에 부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월북자와 일본인들이 버리고 떠나면서 무주물(無主物/Res nullius)이 된 땅에 형성된 이 마을은, 1980년대 들어 정부가 이 지역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각종 땅문서를 들고 나타난 자칭 땅주인들이 거주민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유재산권 관련 분쟁이라는 핑계로 정부가 팔짱을 끼고 관망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땅을 잃거나 하루 아침에 소작농으로 전락했는데, 작가는 특히 여성 이주자들에 주목한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토지소유가 호주제에 근거했기에 호주인 남편을 잃고 토지를 경작해 온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국 토지소유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라면 정치가들의 고질적인 무책임함이나 남성중심적 국가정책의 또 다른 폐해 사례로 정리될 수 있을 이 작업을 흥미롭게 만드는 건 목소리와 이미지가 (탈)배치되는 방식이다. 위의 기구한 사연을 토로하는 할머니가 오로지 목소리로만 등장하기에 이 내용을 귀로 들으면서 관객은 그가 잃어버린 집의 내부를 훑어보게 된다. 마치 드론 카메라처럼 기계적인 동선을 따라 집안 내부를 부유하는 시점은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육체성을 얻는 것 같지만, 하나의 몸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이 시선은 사실 유령처럼 부유한다. 이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고, 무엇보다 땅의 실소유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처럼 ‘60호’라는 숫자로 환원된 채 허무하게 무효화된 여성들의 법적 지위를 절묘하게 (비)가시화한다. 이러한 (비)가시성은 토지소유권 문제가 벌어진 양지리가 처음부터 대북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허상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더욱 첨예해진다.
최찬숙의 작업은, 특히 반재하가 자신의 이번 공연을 “닿을 수 없는 장소에 접근하는 유사이미지 생성 공연”이라 규정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절묘한 공명을 만든다. 과연 양지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의 대답을 가능케하는 이 질문은 <메이크홈, 스위트홈> 공연의 기원에 배치한 탈북자들의 기억이 갖는 성격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하지만 이들을 단지 ‘허구적(fictional)’이라 할 수 있을까? 양자는 전적으로‘거짓’이라거나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은 물론, 그 모두가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기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령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말과 사물, 존재와 이름 사이에 세워진 관계를 재조직하는” 작업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들은 ‘허구적’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임무”라 단언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변주해, 이를 ‘픽션의 물질성’이라 부르면 어떨까?
AI가 ‘요술방망이’처럼 만들어내는 수많은 문장과 수식, 영상과 소리들은 ‘북한’에 대해, 혹은 북한에서 만들어진 산물들보다 더 ‘허구적’인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전자에 대한 우리의 감식안은, 후자에 대해 우리가 누적해온 ‘섬뜩한 낯섦(unheimlichkeit)’의 정동 위에서 보다 세공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여전히 소환되곤하는 ‘냉전’의 시대착오적 위상은 전례 없어 보이는 전자의 도래에 맞서는 우리의 가장 시의적절한 참조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반재하의 근미래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냉전’과 ‘북한’의 유령들은 이런 근본적인 의미에서 ‘남한의 바깥’은 물론 ‘픽션의 가장자리’를 배회하게 될 것이다.
관객을 위한 퍼포먼스 가이드
드라마터그 김솔지
MAKE HOME, SWEET HOME ?
이 공연은 여러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공연에 네트워크된 행위자들은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행위자들은 무대에 펼쳐진 알고리즘을 순회합니다. 입력과 출력의 여정에서 제작되는 이미지는 다양합니다. 원초적인 이미지 생성 방식인 펜과 물감으로 그린 드로잉, 계획을 표준화된 추상적 질서로 구체화하는 디지털 평면도, 이미지를 3차원에 물적 배치하는 미니어처, 프롬프트에 의해 실시간으로 이미지를 생성하는 AI 생성 이미지, 이 모든 것이 "이미지(image)"입니다. 닿을 수 없는 공간, 인터뷰이의 집(SWEET HOME)을 이미지로 구성(MAKE HOME)하는 이번 공연은 가상의 건축입니다. 우리는 공연의 러닝타임 동안 짓습니다.
MAKE HOME, SWEET HOME !
관객 여러분께서 1시간 남짓 무대에서 걷고, 음성과 소리에 집중하고, 스크린에서 모바일 기기로, 다시 퍼포머의 테이블로 시선을 옮기고, 투표에 참여하신다면, 여러분은 이 이미지 짓기에 동참하시게 됩니다. 시선을 지탱하는 스크린, 소리를 펼치는 스피커, 수십 명의 인터넷 접속을 유지하는 회선, 단어를 이미지로 산출하는 AI도 모두 건설하고 있습니다. 무대에 선 인간과 비인간의 협업인 것이죠. 무대에 자리를 배정 받은 퍼포머와 백스테이지에 데스크를 펼친 오퍼레이터도 함께 수행합니다.
MAKE HOME, SWEET HOME =
여전히 공연이 왜 가상의 건축이라 불리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실 것 같습니다. 이번 공연, 혹은 모델은 멈춤 없는 거대 연산 과정에 투입되는 또 하나의 연산입니다. 이 연산은 AI가 경유하는 전지구적 연산을 지탱하는 동시에 연산의 순항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건축적’입니다. 허공에 지어진 건축물이 스스로 그 자체를 지탱하는 지지체이자,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하중에 맞서는 저항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이 건축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공연 중 생성되는 이미지는 도대체 무엇을 구성한다는 것일까요? 함께 만드는 이미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에게는 분명 현존하는 집이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변함없이 인식되고 있는 집은, 무대에 선 행위자들에게는 닿을 수 없고, 지각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없던 집을 그려나가는 MAKE HOME, SWEET HOME에서 다양한 형식의 이미지를 통해 그곳을 감지하게 됩니다. 감각하고자 가상으로 떠올린 이미지인 것이죠.
MAKE HOME, SWEET HOME #
이처럼 실제적이면서 가상의 성격을 띠는 ‘이미지 집짓기’는 경계를 넘어온 이들의 이야기에 방문하기를 시도합니다. 공연의 행위자들은 산출한 이미지를 태깅해 거대한 연산에 밀어 넣으며, 자연스러움 속에 머물러 있는 모순의 재감각에 관여합니다. 전지구적 연산 시스템의 자장에서,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의 작동 속에서, 무대 위에서, 우리가 함께 밟아나가는 회로는 편향과 단절, 격차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예술적 시도일 수 있을까요.
드라마터그 김솔지
MAKE HOME, SWEET HOME ?
이 공연은 여러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공연에 네트워크된 행위자들은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행위자들은 무대에 펼쳐진 알고리즘을 순회합니다. 입력과 출력의 여정에서 제작되는 이미지는 다양합니다. 원초적인 이미지 생성 방식인 펜과 물감으로 그린 드로잉, 계획을 표준화된 추상적 질서로 구체화하는 디지털 평면도, 이미지를 3차원에 물적 배치하는 미니어처, 프롬프트에 의해 실시간으로 이미지를 생성하는 AI 생성 이미지, 이 모든 것이 "이미지(image)"입니다. 닿을 수 없는 공간, 인터뷰이의 집(SWEET HOME)을 이미지로 구성(MAKE HOME)하는 이번 공연은 가상의 건축입니다. 우리는 공연의 러닝타임 동안 짓습니다.
MAKE HOME, SWEET HOME !
관객 여러분께서 1시간 남짓 무대에서 걷고, 음성과 소리에 집중하고, 스크린에서 모바일 기기로, 다시 퍼포머의 테이블로 시선을 옮기고, 투표에 참여하신다면, 여러분은 이 이미지 짓기에 동참하시게 됩니다. 시선을 지탱하는 스크린, 소리를 펼치는 스피커, 수십 명의 인터넷 접속을 유지하는 회선, 단어를 이미지로 산출하는 AI도 모두 건설하고 있습니다. 무대에 선 인간과 비인간의 협업인 것이죠. 무대에 자리를 배정 받은 퍼포머와 백스테이지에 데스크를 펼친 오퍼레이터도 함께 수행합니다.
MAKE HOME, SWEET HOME =
여전히 공연이 왜 가상의 건축이라 불리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실 것 같습니다. 이번 공연, 혹은 모델은 멈춤 없는 거대 연산 과정에 투입되는 또 하나의 연산입니다. 이 연산은 AI가 경유하는 전지구적 연산을 지탱하는 동시에 연산의 순항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건축적’입니다. 허공에 지어진 건축물이 스스로 그 자체를 지탱하는 지지체이자,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하중에 맞서는 저항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이 건축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공연 중 생성되는 이미지는 도대체 무엇을 구성한다는 것일까요? 함께 만드는 이미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에게는 분명 현존하는 집이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변함없이 인식되고 있는 집은, 무대에 선 행위자들에게는 닿을 수 없고, 지각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없던 집을 그려나가는 MAKE HOME, SWEET HOME에서 다양한 형식의 이미지를 통해 그곳을 감지하게 됩니다. 감각하고자 가상으로 떠올린 이미지인 것이죠.
MAKE HOME, SWEET HOME #
이처럼 실제적이면서 가상의 성격을 띠는 ‘이미지 집짓기’는 경계를 넘어온 이들의 이야기에 방문하기를 시도합니다. 공연의 행위자들은 산출한 이미지를 태깅해 거대한 연산에 밀어 넣으며, 자연스러움 속에 머물러 있는 모순의 재감각에 관여합니다. 전지구적 연산 시스템의 자장에서,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의 작동 속에서, 무대 위에서, 우리가 함께 밟아나가는 회로는 편향과 단절, 격차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예술적 시도일 수 있을까요.
연출노트: 오해의 퍼포먼스
연출 반재하
〈MAKE HOME, SWEET HOME〉의 최종적인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공연의 구조와 행위의 종류, 타이밍까지 모두 설계했는데도 말입니다.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이 공연에서 중심이 되는 건 명확한 상보다 행위자들의 연결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연결망을 주선하고 촉진하고 단절하는 것, 제가 한 연출을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공연의 기획은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공간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공간에 접근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 금지되었다보니, 그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편협하고 경직돼 있지요. 편협하고 경직된 시선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여기이고, 여기서부터 감각을 재편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거나 구할 수 없는 데이터를 공연에서 쓰지 않기로 한 이유입니다.
연결망을 만들며 가장 피하려고 했던 건 행위자 간 위계였습니다. 이 공연은 접근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살다 온 이들의 인터뷰에서 시작합니다. 여러 행위자를 거치며 그 모양은 변합니다. 하지만 각 행위자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원형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원형은 누구도 확인할 수 없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연결망 사이에서 이런 질문을 나누고 싶습니다. 행위자와 행위자 사이에서 어떤 오해들이 오고 가는가? 저는 이 공연을 오해의 퍼포먼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야말로 우리가 서 있는 여기가 시각화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많은 오해와 오인과 오독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연출 반재하
〈MAKE HOME, SWEET HOME〉의 최종적인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공연의 구조와 행위의 종류, 타이밍까지 모두 설계했는데도 말입니다.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이 공연에서 중심이 되는 건 명확한 상보다 행위자들의 연결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연결망을 주선하고 촉진하고 단절하는 것, 제가 한 연출을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공연의 기획은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공간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공간에 접근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 금지되었다보니, 그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편협하고 경직돼 있지요. 편협하고 경직된 시선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여기이고, 여기서부터 감각을 재편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거나 구할 수 없는 데이터를 공연에서 쓰지 않기로 한 이유입니다.
연결망을 만들며 가장 피하려고 했던 건 행위자 간 위계였습니다. 이 공연은 접근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살다 온 이들의 인터뷰에서 시작합니다. 여러 행위자를 거치며 그 모양은 변합니다. 하지만 각 행위자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원형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원형은 누구도 확인할 수 없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연결망 사이에서 이런 질문을 나누고 싶습니다. 행위자와 행위자 사이에서 어떤 오해들이 오고 가는가? 저는 이 공연을 오해의 퍼포먼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야말로 우리가 서 있는 여기가 시각화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많은 오해와 오인과 오독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MAKE TRUTH, from SWEET NOISE
태깅퍼포머 임가영
이 글은 〈MAKE HOME, SWEET HOME〉의 본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의 손에 주어진다.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 퍼포머가 무대 뒷편으로 퇴장하거나 오디오-비주얼 장치가 정보의 출력을 멈춘 상황에서, 관람자가 공간 전체를 한층 느긋하게 관찰할 기회를 얻은 - 즉 관객만이 공연의 주요 행위자로 남은 순간을 상상하며 글을 시작한다. 일종의 소강 상태에 접어든 공간에서 비로소 명확히 드러나는, 바닥을 가로지르는 선을 바라보자. 행위자-개체들 사이를 관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 선은 그들간의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적 기호이자, 혹은 이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이동 경로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럼 이 선을 따라 이동‘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금 공연의 몇몇 과정을 떠올려 본다. 학습된 데이터 및 프롬프트에 따라 생성된 이미지가 무대 전면 벽 우측의 스크린에 투사되면, 이미지는 퍼포머의 묘사로 전환되어 마이크를 통해 증폭된 사운드로 출력된다. 이 청각 정보에 의존해 만들어진 제작 퍼포머의 작업물은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디지털화되고, 이 디지털 이미지는 학습 데이터셋의 일부로 되먹임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재차 번역 혹은 변형을 거쳐가는 것의 실체는 ‘정보’ 혹은 ‘데이터’ 이다. 데이터를 전달받고 생성하고 또 다시 되먹임하는, 펼쳐진 회로도를 연상시키는 무대의 구조는 AI 알고리즘의 공간적 번역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펼쳐진 알고리즘 위를 횡단하거나 멈춰서서 듣고 보는 관람자 역시 그 체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관람자는 공연 중간 이루어지는 실시간 투표를 통해 무대 위 행위자들 사이의 협업, 혹은 대화에 동참한다. 관객의 투표를 공연 구조에 연결시키는 회로도의 이미지는 언뜻 60년대 사이버네틱스 연구자이자 공연예술가인 고든 파스크(Gordon Pask)의 ‘사이버네틱 시어터(Cybernetic Theatre)’를 연상시킨다. 실제 실현된 적 없는 이 기획은 관객이 좌석 옆에 설치된 투표 버튼을 통해 실시간으로 내용을 결정해나가는 연극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MAKE HOME, SWEET HOME〉과 관객을 매개하는 것은 투표라는 장치만이 아니다. 알고리즘 순서도와 사이버네틱 시어터의 구조 자체가, 관객의 상상력이라는 힘을 빌어 완성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디자인’*일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스크린을 통해서 떠오르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통해, 또 때로는 눈 앞에서 직접 만들어지는 조형 작품을 통해 기계와 인간이 협력하거나 경합하면서, 직접 가서 보지 못할 장소의 집을 점차 지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미지들은 ‘진실’(truth)과 얼마나 가깝고 또 멀까? 인터뷰이가 살았던 집은 정말 이렇게 생겼을까? 누구에게도 이런 판단의 역할이 맡겨져 있지는 않다. 다만 공연의 행위자, 정확히는 태깅 퍼포머는 기계가 어떤 데이터를 참(truth)으로 판별할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연 안을 순환하는 데이터를 떠나 보다 넓은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지정학적 한계 때문에 생긴 먼 거리의 흐릿한 이미지를 다름 아닌 공연 현장 안에서의 ‘실측’을 통해 한층 뚜렷한 이미지로 조정하는 역할, 그라운드 트루싱(Ground-truhting)**의 과제를 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이미지, 혹은 감각을 조정한다는 것은 단지 노이즈를 매끈하게 제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경계면의 노이즈 속에서 보다 정밀한 형태를 발견해내는 작업이 될 수 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은 앞서 들었던 인터뷰에서 생략되었던 각 인터뷰이의 소회를 들을 수 있다. 인터뷰이는 집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될 수 없는 주관적 느낌을 털어놓기도 한다. 본 공연의 AI 프롬프트에서 탈락한 이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이미지 생성 이전의 노이즈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처럼 노이즈를 보고 듣고자 하면서, 기계의 한계를 우회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기계와 협력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정치적, 기술적 상황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길이 될지 모른다.
태깅퍼포머 임가영
이 글은 〈MAKE HOME, SWEET HOME〉의 본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의 손에 주어진다.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 퍼포머가 무대 뒷편으로 퇴장하거나 오디오-비주얼 장치가 정보의 출력을 멈춘 상황에서, 관람자가 공간 전체를 한층 느긋하게 관찰할 기회를 얻은 - 즉 관객만이 공연의 주요 행위자로 남은 순간을 상상하며 글을 시작한다. 일종의 소강 상태에 접어든 공간에서 비로소 명확히 드러나는, 바닥을 가로지르는 선을 바라보자. 행위자-개체들 사이를 관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 선은 그들간의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적 기호이자, 혹은 이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이동 경로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럼 이 선을 따라 이동‘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금 공연의 몇몇 과정을 떠올려 본다. 학습된 데이터 및 프롬프트에 따라 생성된 이미지가 무대 전면 벽 우측의 스크린에 투사되면, 이미지는 퍼포머의 묘사로 전환되어 마이크를 통해 증폭된 사운드로 출력된다. 이 청각 정보에 의존해 만들어진 제작 퍼포머의 작업물은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디지털화되고, 이 디지털 이미지는 학습 데이터셋의 일부로 되먹임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재차 번역 혹은 변형을 거쳐가는 것의 실체는 ‘정보’ 혹은 ‘데이터’ 이다. 데이터를 전달받고 생성하고 또 다시 되먹임하는, 펼쳐진 회로도를 연상시키는 무대의 구조는 AI 알고리즘의 공간적 번역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펼쳐진 알고리즘 위를 횡단하거나 멈춰서서 듣고 보는 관람자 역시 그 체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관람자는 공연 중간 이루어지는 실시간 투표를 통해 무대 위 행위자들 사이의 협업, 혹은 대화에 동참한다. 관객의 투표를 공연 구조에 연결시키는 회로도의 이미지는 언뜻 60년대 사이버네틱스 연구자이자 공연예술가인 고든 파스크(Gordon Pask)의 ‘사이버네틱 시어터(Cybernetic Theatre)’를 연상시킨다. 실제 실현된 적 없는 이 기획은 관객이 좌석 옆에 설치된 투표 버튼을 통해 실시간으로 내용을 결정해나가는 연극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MAKE HOME, SWEET HOME〉과 관객을 매개하는 것은 투표라는 장치만이 아니다. 알고리즘 순서도와 사이버네틱 시어터의 구조 자체가, 관객의 상상력이라는 힘을 빌어 완성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디자인’*일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스크린을 통해서 떠오르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통해, 또 때로는 눈 앞에서 직접 만들어지는 조형 작품을 통해 기계와 인간이 협력하거나 경합하면서, 직접 가서 보지 못할 장소의 집을 점차 지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미지들은 ‘진실’(truth)과 얼마나 가깝고 또 멀까? 인터뷰이가 살았던 집은 정말 이렇게 생겼을까? 누구에게도 이런 판단의 역할이 맡겨져 있지는 않다. 다만 공연의 행위자, 정확히는 태깅 퍼포머는 기계가 어떤 데이터를 참(truth)으로 판별할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연 안을 순환하는 데이터를 떠나 보다 넓은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지정학적 한계 때문에 생긴 먼 거리의 흐릿한 이미지를 다름 아닌 공연 현장 안에서의 ‘실측’을 통해 한층 뚜렷한 이미지로 조정하는 역할, 그라운드 트루싱(Ground-truhting)**의 과제를 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이미지, 혹은 감각을 조정한다는 것은 단지 노이즈를 매끈하게 제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경계면의 노이즈 속에서 보다 정밀한 형태를 발견해내는 작업이 될 수 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은 앞서 들었던 인터뷰에서 생략되었던 각 인터뷰이의 소회를 들을 수 있다. 인터뷰이는 집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될 수 없는 주관적 느낌을 털어놓기도 한다. 본 공연의 AI 프롬프트에서 탈락한 이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이미지 생성 이전의 노이즈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처럼 노이즈를 보고 듣고자 하면서, 기계의 한계를 우회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기계와 협력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정치적, 기술적 상황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길이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