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 Time Living Labor
죽은 시간 산 노동
2017.09.14 - 10.01
SPACE UNION, Seoul 스페이스 유니온, 서울
Supported by Seoul Art Space Mullae
후원: 서울문화재단 문래예술공장
김지원의 개인전 <죽은 시간 산 노동>은 노동으로 그리는 하나의 패턴(pattern)과 같다. 직물의 무늬나 틀을 뜻하는 ‘패턴’은 이번 전시 구성(construction)의 중심에 놓인다. ‘노동’을 매개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로 재현된다. 각각의 작품들은, 우리 세계의 현실이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작품으로 구현된 노동의 여러 요소들은 서로 간섭하면서 하나의 패턴을 그려낸다.
6시 퇴근시간 이후 2시간 30분을 남아 야근을 했다. 야근수당은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을 채워야 나온다. 9시까지는 30분이 남았고, 회사를 나서기 망설여진다. 그렇게 30분을 더 머물고 받는 야근수당은 6,000원이다. <야근수당 주세요>는 김지원 작가가 주변의 노동 환경을 퍼포먼스로 재프로그램 한 작업이다. 퍼포먼스에 참여한 관객에게는 실제의 노동 조건에서 변조된 규칙이 주어진다. ‘아무것도 안 하기’ 15분에 6,000원, 이 1단계를 통과하면 2단계는 30분에 6,000원이 지급된다. 최대 12단계 180분까지 무익한 노동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다. 야근 180분에 수당 6,000원이라는 실재의 공식은 마지막 12단계에 있다. 15분에 6,000원이라는 근로조건은 비현실적이고, 30분에 6,000원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시급이라면, 가장 마지막 단계 180분에 6,000원은 내 친구의 현실이다. 김지원 작가는 <야근수당 주세요>로 야근수당 규정을 뒤틀어버림으로써 현실의 노동 조건과 그 조건에서 파생되는 현상을 강조한다. 어떠한 생산도 이루어지지 않는 노동은 퍼포먼스 참여자, 즉 노동자에게는 '죽은 시간'이 되고, 작가는 이 무용한 노동의 주문자로서 계약서 작성과 비용 지불이라는 과정을 운영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수행한다. <죽은 시간 산 노동>이다.
탐색은 조금 더 멀리 나아간다. 김지원은 의류공장 노동 환경에 관심을 갖는다. 설치작업 <셔츠와 셔츠>는 의류 SPA 브랜드 유니클로(UNIQLO)에서 셔츠 한 장을 사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구입한 (무한히 복제됐지만, 모방을 시도하는 순간 원본의 지위에 오른) 유니클로 셔츠와 가장 닮은 원단을 구입하고, 전문가에게 패턴 뜨기를 맡긴다. 베트남의 어느 의류공장으로 가서 그 공장의 노동자에게 모방 셔츠 제작을 아웃소싱한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받는 월급의 이틀 임금으로 값을 치룬다. <셔츠와 셔츠>의 두 셔츠는 제목에서 어떠한 구분도 없는 것처럼, 닮았다. 눈으로 셔츠를 비교해본다고 해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제작 과정, 그 과정에 담긴 노동은 다를지라도, 결과물을 얻는 우리에게 절차에서 발생한 무수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무차별성 안에 차이를 담고, 그러나 또한 의류 제작 과정을 가능한 방식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약화시킨다.
여기서 언뜻 떠오르는 의류산업의 노동환경과 노동자들의 인권문제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근대의 시작부터 맞닿는 우리의 역사이자, 현재 진행형인 노동의 역사다. 1970년대 구로공단의 여공들은 잠 안 오는 약으로 버티며 12시간 이상 열악한 환경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했다. 2013년 방글라데시의 무허가건물 라나 플라자(Rana Plaza)는 무너졌고, 비상구 없이 작은 창문마저 쇠창살로 가려진 의류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우리가 입는 많은 옷, 우리 삶에 연루된 많은 일들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된다. 작가 역시 이러한 환경에 거주하는 개인으로서, 그 환경에 부임하는 존재로서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탐색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기반을 이용하여 베트남의 노동 환경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레디메이드 셔츠의 모방품을 단계별로 아웃소싱함으로써 유니클로 셔츠를, 그 노동을 재현한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과정을 낱낱이 제시하지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충격, 또는 익숙함을 작업에서 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작업 중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고, 그 환경에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그 실제적 위치와 인식상의 위치를 일치시키는 시도들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김지원에게 노동은 ‘나’를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매개이고, 그 전에 작업의 시작을 지시하는 기호이다.
수행은 계속된다. <496,875원>, <517,083원>, <456,250원>은 알바비로 교환된 타자화 된 ‘나’의 노동을 작가로서 ‘나’의 작업에 그대로 들여온 작품이다. 작가로서 ‘나’의 노동을 돌아본 결과로서, 수행한 노동의 반복, 그 고백의 수행이다. 어시스턴트로서 그리기는 임금보상을 위한 노동에서 작가로서 나의 작업을 위한 노동으로 역전(reverse)된다.
김지원은 노동을 매개로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자신을 세운다. 이때 ‘노동’은 작업 내용의 핵심 개념이라기보다, 작업을 시작하도록 지시하는 기호(sign)로 보인다. <만능 알람>의 각기 다른 6개의 작업량 확인 알람이 이를 일깨운다. 제너럴 모터스사(General Motors Corporation, GM)의 생산라인에서 6분마다 울리는 작업량 확인 알람은 다른 생산라인에서 이용하는 알람, 알람 제도를 익숙하게 만드는 학교의 종소리, 그 알람의 기원인 교회 종소리와 교차되며 괴이한 사운드를 발생시킨다. 김지원은 여러 매체를 이용하여 하나의 상을 그려내고 그 앞에 선다. 거기 펼쳐진 것은 노동으로 그리는 패턴이다. 그의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 작업 각각은 실제로 그가 전시를 준비하며 거쳐 온 절차에 비해 생각해보면 과정적이거나 표현적이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각각의 작업은 그 작업을 촉발시켰던 노동을 매개로 드러나며,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각의 작업이 지닌 노동의 요소들을 내비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작업자 김지원의 좌표가 생성된다.
이번 전시에 놓인 각각의 작업이 그려내는 하나의 모습은 김지원이 노동을 매개로 바라본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상은 눈에 비치고, 늘 드러나 있지만 그 모습이 실제로 어떻게 구성(construction)되어 있는지 알기 위해서 예술가는 작업을 한다. 그는 분명 노동 환경 개선을 외치거나, 기업의 엉터리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를 고발하지 않는다. 고도 자본주의의 생산에 들어가는 온갖 비윤리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원단을 구매하는 사소한 행위에서도 그는 이미 시스템 내 존재이고, 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존재다. 그의 행위 속에 자연스럽게 비윤리가 포함되고, 그 과정을 통해 노동자는 월급을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착취당한다. 그렇게 사회는 불균형적으로 순환한다.
여전히 나 그리고 너, 가깝고 먼 주변의 노동에는 긍정적 요소보다는 부정적 요소가 더 부가돼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죽음’이라 불리는 필리핀 수빅 조선소(Subic shipyard) 같은 하청 공장의 노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노동의 긍정적 요소가 갖춰져 있다. 이 모두 현실이지만, 각각의 현실은 너무나 상이하게 구성돼 있다. 모든 먹고 사는 일을 ‘노동’으로 부르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노동이라는 사회 내 생산과정의 일상적 참여와, 이로 인한 소비는 참으로 불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다. 또한 이 불균형의 파생상품들이 달갑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는 노동환경 양 극단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자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요구, 주장, 더 나아간다면 운동은 내가 누군가를 구제한다거나 그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차원은 결코 아니다. 세계에서 내가 찍고 있는 좌표를 확인하는 일에서 그 불균형은 지양된다. 작가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둘러싼 환경을 기반으로 하여, 나에게는 일반적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나의 환경과 멀어질수록 특수하게 다가갈 삶의 경험을 표현하는 일로 완성된다.
죽은 시간 산 노동
2017.09.14 - 10.01
SPACE UNION, Seoul 스페이스 유니온, 서울
Supported by Seoul Art Space Mullae
후원: 서울문화재단 문래예술공장
Double Pattern Work
김지원 개인전 <죽은 시간 산 노동>, 2017
김지원 개인전 <죽은 시간 산 노동>, 2017
김지원의 개인전 <죽은 시간 산 노동>은 노동으로 그리는 하나의 패턴(pattern)과 같다. 직물의 무늬나 틀을 뜻하는 ‘패턴’은 이번 전시 구성(construction)의 중심에 놓인다. ‘노동’을 매개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로 재현된다. 각각의 작품들은, 우리 세계의 현실이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작품으로 구현된 노동의 여러 요소들은 서로 간섭하면서 하나의 패턴을 그려낸다.
탐색 - 수행
6시 퇴근시간 이후 2시간 30분을 남아 야근을 했다. 야근수당은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을 채워야 나온다. 9시까지는 30분이 남았고, 회사를 나서기 망설여진다. 그렇게 30분을 더 머물고 받는 야근수당은 6,000원이다. <야근수당 주세요>는 김지원 작가가 주변의 노동 환경을 퍼포먼스로 재프로그램 한 작업이다. 퍼포먼스에 참여한 관객에게는 실제의 노동 조건에서 변조된 규칙이 주어진다. ‘아무것도 안 하기’ 15분에 6,000원, 이 1단계를 통과하면 2단계는 30분에 6,000원이 지급된다. 최대 12단계 180분까지 무익한 노동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다. 야근 180분에 수당 6,000원이라는 실재의 공식은 마지막 12단계에 있다. 15분에 6,000원이라는 근로조건은 비현실적이고, 30분에 6,000원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시급이라면, 가장 마지막 단계 180분에 6,000원은 내 친구의 현실이다. 김지원 작가는 <야근수당 주세요>로 야근수당 규정을 뒤틀어버림으로써 현실의 노동 조건과 그 조건에서 파생되는 현상을 강조한다. 어떠한 생산도 이루어지지 않는 노동은 퍼포먼스 참여자, 즉 노동자에게는 '죽은 시간'이 되고, 작가는 이 무용한 노동의 주문자로서 계약서 작성과 비용 지불이라는 과정을 운영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수행한다. <죽은 시간 산 노동>이다.
탐색은 조금 더 멀리 나아간다. 김지원은 의류공장 노동 환경에 관심을 갖는다. 설치작업 <셔츠와 셔츠>는 의류 SPA 브랜드 유니클로(UNIQLO)에서 셔츠 한 장을 사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구입한 (무한히 복제됐지만, 모방을 시도하는 순간 원본의 지위에 오른) 유니클로 셔츠와 가장 닮은 원단을 구입하고, 전문가에게 패턴 뜨기를 맡긴다. 베트남의 어느 의류공장으로 가서 그 공장의 노동자에게 모방 셔츠 제작을 아웃소싱한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받는 월급의 이틀 임금으로 값을 치룬다. <셔츠와 셔츠>의 두 셔츠는 제목에서 어떠한 구분도 없는 것처럼, 닮았다. 눈으로 셔츠를 비교해본다고 해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제작 과정, 그 과정에 담긴 노동은 다를지라도, 결과물을 얻는 우리에게 절차에서 발생한 무수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무차별성 안에 차이를 담고, 그러나 또한 의류 제작 과정을 가능한 방식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약화시킨다.
여기서 언뜻 떠오르는 의류산업의 노동환경과 노동자들의 인권문제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근대의 시작부터 맞닿는 우리의 역사이자, 현재 진행형인 노동의 역사다. 1970년대 구로공단의 여공들은 잠 안 오는 약으로 버티며 12시간 이상 열악한 환경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했다. 2013년 방글라데시의 무허가건물 라나 플라자(Rana Plaza)는 무너졌고, 비상구 없이 작은 창문마저 쇠창살로 가려진 의류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우리가 입는 많은 옷, 우리 삶에 연루된 많은 일들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된다. 작가 역시 이러한 환경에 거주하는 개인으로서, 그 환경에 부임하는 존재로서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탐색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기반을 이용하여 베트남의 노동 환경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레디메이드 셔츠의 모방품을 단계별로 아웃소싱함으로써 유니클로 셔츠를, 그 노동을 재현한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과정을 낱낱이 제시하지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충격, 또는 익숙함을 작업에서 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작업 중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고, 그 환경에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그 실제적 위치와 인식상의 위치를 일치시키는 시도들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김지원에게 노동은 ‘나’를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매개이고, 그 전에 작업의 시작을 지시하는 기호이다.
수행은 계속된다. <496,875원>, <517,083원>, <456,250원>은 알바비로 교환된 타자화 된 ‘나’의 노동을 작가로서 ‘나’의 작업에 그대로 들여온 작품이다. 작가로서 ‘나’의 노동을 돌아본 결과로서, 수행한 노동의 반복, 그 고백의 수행이다. 어시스턴트로서 그리기는 임금보상을 위한 노동에서 작가로서 나의 작업을 위한 노동으로 역전(reverse)된다.
노동으로 그리는 패턴
김지원은 노동을 매개로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자신을 세운다. 이때 ‘노동’은 작업 내용의 핵심 개념이라기보다, 작업을 시작하도록 지시하는 기호(sign)로 보인다. <만능 알람>의 각기 다른 6개의 작업량 확인 알람이 이를 일깨운다. 제너럴 모터스사(General Motors Corporation, GM)의 생산라인에서 6분마다 울리는 작업량 확인 알람은 다른 생산라인에서 이용하는 알람, 알람 제도를 익숙하게 만드는 학교의 종소리, 그 알람의 기원인 교회 종소리와 교차되며 괴이한 사운드를 발생시킨다. 김지원은 여러 매체를 이용하여 하나의 상을 그려내고 그 앞에 선다. 거기 펼쳐진 것은 노동으로 그리는 패턴이다. 그의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 작업 각각은 실제로 그가 전시를 준비하며 거쳐 온 절차에 비해 생각해보면 과정적이거나 표현적이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각각의 작업은 그 작업을 촉발시켰던 노동을 매개로 드러나며,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각의 작업이 지닌 노동의 요소들을 내비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작업자 김지원의 좌표가 생성된다.
이번 전시에 놓인 각각의 작업이 그려내는 하나의 모습은 김지원이 노동을 매개로 바라본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상은 눈에 비치고, 늘 드러나 있지만 그 모습이 실제로 어떻게 구성(construction)되어 있는지 알기 위해서 예술가는 작업을 한다. 그는 분명 노동 환경 개선을 외치거나, 기업의 엉터리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를 고발하지 않는다. 고도 자본주의의 생산에 들어가는 온갖 비윤리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원단을 구매하는 사소한 행위에서도 그는 이미 시스템 내 존재이고, 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존재다. 그의 행위 속에 자연스럽게 비윤리가 포함되고, 그 과정을 통해 노동자는 월급을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착취당한다. 그렇게 사회는 불균형적으로 순환한다.
여전히 나 그리고 너, 가깝고 먼 주변의 노동에는 긍정적 요소보다는 부정적 요소가 더 부가돼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죽음’이라 불리는 필리핀 수빅 조선소(Subic shipyard) 같은 하청 공장의 노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노동의 긍정적 요소가 갖춰져 있다. 이 모두 현실이지만, 각각의 현실은 너무나 상이하게 구성돼 있다. 모든 먹고 사는 일을 ‘노동’으로 부르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노동이라는 사회 내 생산과정의 일상적 참여와, 이로 인한 소비는 참으로 불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다. 또한 이 불균형의 파생상품들이 달갑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는 노동환경 양 극단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자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요구, 주장, 더 나아간다면 운동은 내가 누군가를 구제한다거나 그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차원은 결코 아니다. 세계에서 내가 찍고 있는 좌표를 확인하는 일에서 그 불균형은 지양된다. 작가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둘러싼 환경을 기반으로 하여, 나에게는 일반적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나의 환경과 멀어질수록 특수하게 다가갈 삶의 경험을 표현하는 일로 완성된다.
김솔지